폐교를 문화공간으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전경
2013년 4월말 현재 3만2560명이 생활하고 있는 청양. 청양은 충남에서 가장 적은 인구 밀집도를 보이는 곳이다. 특히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이 약 30퍼센트에 달할 정도인 초고령 지역으로 어쩔 수 없이 자연 감소되는 인구가 많고, 반면 유입이나 출생 등 증가요인은 그에 비해 턱없이 적은 실정이다. 더욱이 자녀들만이라도 도심으로 내 보내 교육을 받도록 하려는 어른들의 선택은 청양군 인구감소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이는 군내 작은 학교의 폐교 또는 통폐합의 결과를 낳고 있기도 하다.
청양군에서도 1990년대부터 2013년 4월 현재까지 총 19개교가 사라졌다. 이중 다수는 다양한 모습으로 활용되고, 몇몇 곳은 그대로 비어 있다. 비어있는 폐교를 활용할 방법은 없을까, 지자체에 매각하거나 임대를 통해, 또 교육청 자체로 군민을 위한 교육·문화·복지 공간으로 활용할 수는 없는지 타 시·군 사례를 통해 고민해본다. 이번 호에 소개할 곳은 ‘김영갑갤러리 두모악’(관장 박훈일·45·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로 137)이다.
▲ 삼달분교 정문 그대로를 활용한 갤러리 두모악 정문.
폐교된 삼달분교 사진갤러리로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은 1998년 폐교된 삼달분교를 장기 임대해 만든 사진갤러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진작가였던 김영갑 씨에 의해서였고, 폐교 4년 만인 2002년 여름 문을 열었다.(이하 두모악)
김영갑 작가 이야기부터 해본다. 그는 1957년 부여에서 태어난 후 20여 년 동안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했다. 고교 졸업 후 독학으로 사진공부를 했고, 1982년부터는 제주도를 오가며 사진작업을 했다. 그러던 중 제주도의 매력에 빠져 1985년 정착했다. 이후 바닷가, 한라산, 마라도, 해녀, 오름과 바다, 들판과 구름 등 제주도의 모든 것을 사진에 담았다.
▲ 두모악을 세상에 내 놓은 고 김영갑 작가. 그는 무거운 장비를 메고 제주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단다.
필름카메라를 사용하던 시절,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랠 정도로 그는 마치 수행을 하듯 사진 작업을 했단다. 그 결과 그의 열정과 영혼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이 창고에 쌓였고, 이에 김 작가는 그 작품들을 위한 갤러리 마련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하나가 폐교를 구해 전시공간으로 꾸미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사진도 찍으면서 폐교도 구해 갤러리 꾸미는 일을 계속 해 갔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사진을 찍을 때면 셔터를 누르는 손이 떨렸고, 이유 없이 허리에 통증을 느껴야 했다. 카메라를 들지도 제대로 걷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는 등 몸에 이상을 느꼈다. 진단 결과 근육이 점점 퇴화하는 루게릭 병이었고 3년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청천벽력 소리를 듣게 된다. 1999년 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몸을 움직여 사진갤러리 만들기에 열중했고, 결국 2002년 여름 ‘두모악’을 세상에 내 놓게 된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열정을 다했던 곳에 잠들다
제주도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고 그 사진들을 위해 폐교를 장기 임대해 갤러리로 만든 그. 그는 불치병 진단을 받은 후에도 미처 담지 못한 제주의 모습을 찍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직접 야외 정원을 일구는 등 갤러리를 찾은 방문객들을 위한 휴식 공간 꾸미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병을 이기지 못했고, 2005년 5월 29일 49세의 나이로 자신이 만든 갤러리에서 잠들었다. 두모악 개장 3년·투병생활을 시작한 지 6년만이었다.
▲ 교실을 개조한 두모악 내부 전시장 모습.
이런 과정을 거친 사진갤러리 ‘두모악’에는 김 작가가 20여 년 간 열정을 다해 촬영한 제주도 곳곳의 ‘비경’이 전시 돼 있다. 또 생전에 사용하던 사무실은 ‘유품전시실’로 변해 평소 보던 책들과 애지중지했던 카메라가, ‘영상실’에는 투병하던 당시와 작품 활동을 하던 젊은 시절의 그를 화면과 사진을 통해 만나 볼 수도 있다. 그가 일군 야외 정원은 주민들은 물론 멀리서 갤러리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휴식과 명상의 공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제가 삼촌이라고 불렀었어요. 2001년도에 폐교를 임대해서 처음 한 작업이 운동장을 정원으로 만드는 일이었는데, 삼촌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챙기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까지 지역에 서식하는 것으로 꾸몄죠. 정작 자신은 숨 쉬는 것도 버거워하면서 말이죠. 열정이 없었다면 두모악은 없었을 거예요. 그렇게 2005년 세상을 떠났고 갤러리 마당에 뿌려지셨죠. 삼촌은 독신이었고 온 열정을 사진 찍는 일, 또 폐교를 임대해 갤러리를 만드는 일에 모두 쏟았어요.” 김 작가 사망 후 다음 해부터 두모악 책임을 맡은 박훈일 관장의 말이다. 박 관장은 제주도가 고향으로 고교 2학년 때 김 작가의 제자가 됐다.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처럼 지냈던 김 작가의 흑백사진과 또 작업모습에 반해서였단다.
잘 가꾼 자연문화유산 선정
스승이 떠나고 2006년부터 두모악 총 책임을 맡은 박 관장은 김 작가가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한 일들을 차근차근 해 가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그 일은 계속되고 있다. 취재차 방문했던 그날도 박 관장은 작업복에 연장을 들고 정원 내 곳곳을 손 보고 있을 정도였다.
“초창기에는 관람객이 많지 않았어요. 삼촌의 에세이가 호응을 얻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했죠. 특히 삼촌이 떠난 후 많은 분들이 ‘두모악이 계속 유지될까’하고 걱정도 했고요. 그래서 2006년 2월에 사진으로는 처음으로 미술관 등록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지 않도록요. 사립미술관으로도 처음일 거예요. 그리고 그해 11월 한국내셔널트러스트로부터 ‘잘가꾼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되면서 관심을 더 받기 시작했습니다.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보전하고 관리하자는 시민운동이에요. 후원회도 생겨 도움도 주시고요. 요즘은 관람객이 많이 늘었습니다.”
두모악에서 소장하고 있는 김 작가의 작품은 500여점, 이외에도 필름으로는 수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4개의 수장고를 만들어서 보관하고 있다.
“사실 처음에는 갤러리 운영보다 창고에 쌓여있는 작품을 잘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폐교를 임대했고, 어쩌다보니 현재는 갤러리로 운영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감동으로 남을 수 있는 갤러리를 만들고 싶어요. 모두에게 감동과 안식을 주는 그런 공간요. 작품은 1년에 두 차례 교체해요. 100여 작품씩요.”박 관장의 말이다.
폐교였던 삼달분교는 이렇게 김영갑 작가의 열정으로 사진갤러리로 다시 태어났다. 폐교 마당에는 제주 돌담과 덩굴식물들이 어울려 있다. 전시실에는 하늘과 구름, 오름과 바람, 한라산과 마라도 등 제주의 다양한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가득하다.
이순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