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 개인전이 가까워질수록 쌓여 가는 중압감으로 지쳐 갈 즈음, 나는 제주도 '떨이 항공권'을 입수하게 되었다. 개인전을 치르고 난 후 감당해야 할 복잡하고도 미묘한 심경으로부터의 탈출을 미리 준비해 둔 셈이었다. 이를테면 작품에 대한 평가나 성과, 그리고 전시로 인해 발생하는 소소한 불편들을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는 내가 미리 예술 활동에 대한 반성적 자아로부터의 도피를 도모해 둔 것이었다. 개인전이 끝나는 날, 예술적 반성을 회피한 나는 늦은 오후의 어둠을 틈타 제주도에 잠입했다.
지친 영혼을 달래는 예술적 감동
밀감 밭 어디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이 있었다. 김영갑이 루게릭병을 진단 받고 폐교를 세내어 혼신을 다해 갤러리로 꾸며 놓은 그 현장이었다. 갤러리 마당에 손수 심은 나무들과 갖가지 조형물 사이를 걸으며 그의 숨결이 느껴져 발걸음조차 조심스러웠다. 갤러리 입구 사무실에 그가 생전에 쓰던 작업 도구들과 서적들, 애장 소품들이 그가 작업을 하다가 방금 출타라도 한 듯 생생히 놓여 있었다. 전시실에 들어서서 사진 속의 그의 눈과 마주한 순간부터 내게 심상치 않은 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안개와 바람과 어둠과 빛이 우리 삶의 모습으로 풍경화된 작품들이 그의 혼령처럼 우뚝우뚝 서 있었다. 한라산 어디쯤에서 수없이 많은 시간을 파쇄해 가며 죽음 같은 고독 속에 서서 기다렸을 빛에 짓이겨진 어둠과 요동치는 고요와 명징한 불투명들이 나를 향해 서있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육신을 조금씩 조금씩 내어 주며 끝내 삶의 고통과 어둠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 그가 그토록 사랑한 제주의 자연이 되어 버린 것일까. 파노라마 안개의 들판에 저 먼 나무 한 그루, 밤새 서걱거리며 수런거리는 잎새들의 어둠, 지상의 가장 무거운 밤이 오렌지빛으로 부러지는 소리들. 그리고 그가 걸핏하면 찾아가던 어머니 집 같은 오름들. 존재의 붉고도 아픈 고독의 짧은 생이 그의 아름다운 작품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순수 자연풍경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읽어 낸 몇 안 되는 작가 중에 한 사람인 듯했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었고, 사진을 찍다가 죽을지도 몰라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사진만을 위해 전생을 다 바쳐 예술을 완성한 위대하고도 행복한 예술가임에 틀림이 없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오랜 시간을 각고하여 애써 전시를 준비해 놓고 타인의 비평이 두려워 쩔쩔매고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헤맸다. 삶의 많은 것을 예술에 기울이면서도 종종 적당히 타성화된 채 살아가고 있는 부실한 내가 위대한 그의 예술에 의해 무참히 함몰되기에 충분했다. 갤러리 뒤편 무인 카페에 감동과 충격을 달래는 몇몇 사람이 찻잔을 앞에 놓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도 그 틈에 앉아 찻잔 속에 드리워진 어두운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찻잔에 두 손을 모아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어느새 김영갑 예술에 의해 쓰러졌던 나의 의지와 신념들이 하나둘씩 일어서는 걸 느꼈다. 그의 아름다운 삶과 예술이 부족한 나를 일으켜 세우며 어깨를 다독이며 격려하는 듯했다. 갤러리를 나올 때 이미 그는 내게 스승이 되어 있었다.
나를 일으켜 세울 존재는 자신
우리는 지금 힐링이 필요한 힘겨운 시대를 살고 있다. 고속 경제 성장에 따른 정신적인 빈곤과 빈부격차로 인한 박탈감,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대한 속도의 좌절, 과열 경쟁의 폐해와 같은 문명의 그늘에서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들이 길을 잃고 헤맨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지친 영혼을 이끌고 명사 힐링 콘서트를 찾아가고, 밤새워 위로의 글을 뒤적이고, 배낭을 메고 낯선 나라 명소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런데 진정한 힐링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누구인지 묻고 또 물어라"라고 법정 스님이 말했던가. 대상을 통하여 참 나와 만날 수 있다면 길가의 잡초 한 포기에게서도 힐링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바람에 쓰러진 풀잎이 스스로 일어서듯이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관조하여 얻어지는 치유, 힐링은 내 안에 있다.
김춘자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