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악
[한국수필 2017/ 5] [예술마당] 겨울바람 속에 피어난 너도바람꽃

[예술마당] 겨울바람 속에 피어난 너도바람꽃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을 찾아서


온갖 봄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유채꽃, 진달래, 개나리, 목련…. 봄바람이 건 듯 분다. 바람이 속살대며 나를 유혹한다. 봄나들이 떠나라고. 천천히 걸으면서 제주의 자연가 숨결을 느껴보자며 문우와 제주를 찾는다.
서귀포 섭지코지의 유채꽃밭 사이를 거닐며 바람을 맞는다. 제주의 바람은 유난스럽다. 바람따라 흔들리는 유채꽃 물결이 장관이다. 온세상을 샛노랗게 채색한다. 심술궂게 내 모자를 날려버리는 바람은 잔뜩 습기를 머금고 있다. 제주의 거친 자연에 잘 순응하여 곱게 피어난 새생명들이 사랑스럽다. 화사한 이 꽃이 태어날 수 있도록 고통과 시련을 잘 참아낸 식물의 시간을 생각한다.
봄이 되면 바람은 나무를 심하게 흔들어준다. 봄바람이 죽은 나뭇가지를 떨궈내고 가지 끝까지 새 기운을 끌어올리려 온 힘을 다해 격력하게 춤춘다. 무성한 잎과 예쁜 꽃, 알찬 열매를 얻어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우리네 삶도 다르지 않다. 풍파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사진작가 김영갑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부여사람인 그는 제주의 풍광에 반해 이승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20년 남짓 제주인으로 살아간다. 극한의 가난과 외로움을 견뎌내며 사진작업에 몰입하여 사진예술로 일가를 이룬다. 마라도, 중산간 마을, 한라산 등 제주 구석구석을 바람처럼 떠돌며 찍은 파노라마 사진에서 신기(神技)가 느껴진다. 폐교였던 삼달리 분교를 개조하여 그곳에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루게릭병으로 48세에 이승과 작별하여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떠났다.






자연이 주는 황홀경. 그 절정의 순간에 맛보는 희열을 무엇과 바꾸겠는가. 떨림으로 셔터를 누르고 현상되어 나오는 사진 속에서 신비롭고 오묘한 제주의 속살을 체험하고 자연변화가 주는 경이로움에 미친 듯 찍었을 것이다. 그게 그토록 신산한 삶을 지탱해 준 버팀목이 되었을 게다. 나도 언젠가 글쓰기를 하며 희열을 맛본 순간이 있었다. 밤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쓰다 보니 새 아침이 밝았다. 학창시절 시험기간에도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었다. 신선했고 내면이 확장되는 느낌도 좋았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사진들이다. 사진이 아니라 채색화처럼 느껴지고 바람과 안개의 역동성이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작품 하나하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우리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김영갑 작가는 흐뭇해하지 않을까. 그의 마음이 되어 작품을 감상한다. 같은 장소의 사진이 분명한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작품 앞에서 그의 사진작가로서의 천재성과 성실함을 느낀다. 한 예술가의 삶을 경외심으로 마주한다. 햇빛, 바람, 온도, 안개, 구름이 연출하고 절정의 순간을 포착한 작가의 오랜 기다림이 합작해 낸 명작이다. 모든 작품이 경이로워 감탄이 절로 새어 나온다. 짙푸른 바다. 해동이와 해넘이, 사계절의 변화, 풍우와 운무, 우주의 향연이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사진을 통해 그가 좋아했던 놀이터와 놀이를 상상해 본다. 바람을 안고 초원과 오름을 떠돈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와 말의 고요와 평화를 즐긴다. 들꽃과 인사하고 새소리와 뤂벌레 소리 들으며 원하는 사진 배경이 나올 때까지 앵글을 맞추며 숨죽여 기다린다. 오랜 기다림 끝에 셔터를 누른다. 그 충만해지는 순간을 맞기 위해 끝없는 인내가 필요했겠지. 사진은 발로 완성한다는 친척의 말이 생각난다. 개인 전시회, 수상경력이 다채로운 그녀는 내게 작품을 선물할 때 그런 말을 들려주었다. 이제야 그 말의 뜻이 제대로 전해진다. 출사를 나갈 때 가족의 동의를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장난스레 얘기해서 심각함을 놓친 듯하다.
또 다른 작품 앞에서 김영갑 예술가의 뒷모습을 본다. 부모형제, 친구들과 모질게 세상 인연 끊고 굶주림도 참아가며 20여 년간 발로 뛰었던 수련의 결과물 앞에서 나는 숙연해져 눈을 감는다. 한 줄기 바람 되어 이 공간을 지켜줄 듯하다.
그의 신명과 작가적 자부심이 내 의식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기를 바란다.
한편으로는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그가 자랑스럽지만 생명과 맞바꾸며 일군 이 공간에서 나는 그가 가난한 순교자인 듯 느껴져 서러움이 쌓인다. 루게릭병과 눈물겨운 싸움을 벌이며 전시공간을 마련했다. 폐교의 운동장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꾼다. 제주를 상징하는 돌과 바람, 나무와 야생화 그리고 억새, 사람을 상징하는 작은 인형조각 작품. 섬세함이 돋보이고 낮은 돌담을 끼고 걷고 싶은 산책로로 좋은 공간이다. 어디서나 사진 찍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장소이다. 입구에 내 키만한 주황색 조각품이 ‘외진 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우릴 반긴다. 정스럽고 푸근하다. 그를 생각하니 콧날이 시큰거린다. 그가 살아온 세월을 응원하고 작품을 기억하리라.
뒤뜰에도 아기자기한 작은 조형물과 장독대가 자리하고 있고 무인찻집은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수다나눔방으로 활용할 수 있게 배치되어 있다. 문우와 홍차 나누며 이곳 갤러리 관람기를 풀어낸다. 입구 안내판이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사진만을 생각하며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예술가의 숭고한 예술혼’이 담긴 곳이다. 가끔 바람 되어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마라도, 한라산,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들을 나들이하고 영원한 그의 집 두모악 갤러리로 돌아오겠지.
이번 여행길에 찾은 곳은 이 갤러리와 위미동백 군락지, 가시리 녹산리 유채길, 제주 허브동산, 섭지코지와 등대, 사려니 숲길, 오설록 티뮤지엄, 곶자왈 유리의 성이다. 모두가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이다. 나도 사진작가 김영갑처럼 제주를 무척 사랑하지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서 나의 문학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이어서 고맙다. 내 정신에 감전되어 불꽃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감각이 새로워지고 사유가 깊어지길 바란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저서에서 김영갑은 말한다.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피어난 너도바람꽃처럼 고통의 끝에서 무사히 봄을 맞을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그는 한겨울에 움트는 봄의 기운을 보았다고 말한다. 삶을 관통해서 얻은 그의 언어가 더욱 빛난다.


김혜숙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