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왕발이님 | 날짜:2005-07-12
부치지 않은, 못다 쓴 편지 한장
영갑이 형!
망할, 지난번 갔을 때 머리 한번 감겨주지 못하고 온 것이, 등짝 두들겨가며 샤워 한번 시켜주지 못하고 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결국 저 잘났다고 마지막 순간에도 혼자 고고한 척 그렇게 가고 말았구나. 망할.
정말로 이번 여름에는 꼭 내려가서 발가벗겨 앉혀놓고 때 북북 밀어주려고 했는데. 마누라랑 애들 데리고 가서 북새통 떨면서 늙은 총각 속 뒤집어지는 꼴 보고 싶었는데, 시끄럽다고 인상 쓰면 이게 사람 사는 거라고 소리 질러주려고 했었는데, 삼달분교 옥상에 올라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올려다보며 맥주 딱 한 모금 마시게 하고 싶었는데, 뭐 그렇게 바쁘다고 망할,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가냐?
이제 나는 형한테 해주려던 것들을 이룰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구나. 바보 같은 김영갑만 생각하면 그게 한이 되어 가슴이 먹먹하겠구나. 망할, 망할, 또 망할.
나 보고 답답하게 바보처럼 살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대더니, 지는 뭐 잘났냐고 대들면, 그래도 너 보다는 낫다고 큰 소리 뻥뻥 치더니, 끝까지 사람 비참하게 만들고 한 마디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훌쩍 떠나가고 말았구나.
오늘은 오랜만에 비도 그치고, 이젠 나도 살아야지, 잡념 털어버리고 살 길 열심히 찾아다니는데, ‘딩동딩동’ 핸드폰 메일이 들어오지 뭐야. 뭔가 싶어 열어봤더니 형 49제가 벌써 내일 모레라네. 망할.
형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갤러리 보존이나 형을 기념하는 사업 따위엔 관심 없네. 그런 건 똑똑한 사람들이 다 잘하겠지 뭐. 지난번 형 장례식 때도 나서는 사람이 많아 우리는 그냥 표선 나가서 술만 먹다가 뻗었어. 형 화장하는 데도 구차스러울 것 같아 안 따라나서고 그냥 다랑쉬에 올라 형이 그렇게 좋아하던 용눈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지. 가시리 돼지고기 집에 가서 할머니랑 형 얘기하다 그것도 구차스러워 그냥 나오고 말았어.
나는 제주를 잘 몰라. 육지 사람들에게는 제주도에 가면 택시 운전할 정도로 잘 안다고, 그것도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진짜 제주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곳들을 알고 있다고 떠벌리지만, 제주가 내게 그렇게 쉬이 제 속을 열 턱이 없잖아? 그건 형이 더 잘 알지. 그러니까 멍청하게 육지에서 고생하지 말고 내려와서 단 일 년이라도 제주를 제대로 좀 보라고 그랬겠지. 하지만 그게 쉽나.
이번 여름에 기회가 되면 혼자 한번 내려가보려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처럼 형이 있는 갤러리 감나무 밑에 가서 서성거리다 되돌아 나오고, 신양 해녀의 집에 가서 전복죽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성산 거쳐 우도에나 들러보면서 그래, 바람을 느껴보지 뭐, 까짓것. 형이 그토록 외치던 삽시간의 환상이야 멍청하게 마냥 기다리는 형 같은 사람에게나 문을 열 테고, 나는 그냥 바람이나 실컷 맞다가 오려고.
그렇게 형에 대한 기억들을 제주 바람에 날려 보내고 나는 그냥 나로서 돌아올래. 형 사진도, 형 말투도, 비실대던 웃음도 다 놔두고…. 나는 이제 제주를 찾는 의미 하나를 잃었어. 영갑이 형. 갑갑하지 않니? 나는 갑갑해 미치겠다. 형 죽으면 용눈이에다, 그 바람과 풀과 이슬과 벌레와 해와 달과 별과 흙과, 형이 그렇게도 좋아하던 제주의 자연에다 뿌려주고 싶었는데, 그게 형을 더 형답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또 기회 되면 보지 뭐. 망할!